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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MAC Innovation 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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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변화 속 대학의 혁신, 유연학사제도 : Ⅲ. 융합전공제도

시대의 흐름을 읽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급변하는 시대의 흐름을 읽지 못하고 뒤쳐져 낙오되는 기업들을 우리는 국내외에서 쉽게 볼 수 있었다. 더 이상 하나의 전공으로 시대를 이끌던 때는 지났다. 현실의 문제들은 어느 하나의 전공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제는 다양한 전공의 융합을 통해, 그리고 전공 간의 협업을 통해 현장의 복잡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인재양성이 필요하다. 전 편에서 전공선택유연화의 종류와 사례 등을 알아보았고, 본 편에서는 전공선택유연화 제도 중 융합전공제도에 대해 보다 깊이 있게 검토해보고자 한다. 국내외 대학에서 융합 전공의 중요성과 필요성을 인식하고 다양한 융합전공 교육과정에 대해 연구하고 준비하는 이유는 그만큼 사회가 융합형 인재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불과 20여년 사이 사회가 융합형 인재를 필요로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현대 사회에서는 한 분야의 지식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난제들이 새롭게 발생했으며, 특히 미세먼지, 지구온난화 등 기후위기와 같은 복잡한 환경문제는 다양한 학문의 융합적 접근을 통한 해결방안 모색이 필요하다. 또한, 4차 산업혁명 시대를 맞이하며 AI, 빅데이터, 블록체인 등 새로운 기술들이 빠르게 등장하고 있으며 이러한 기술을 이해하고 활용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학문의 융합적 지식과 빠른 학습속도가 필요하다.  이러한 사회적 요구가 커짐에 따라 2010년 중반부터 국내외 대학에서 다양한 학문 분야를 결합한 형태의 융합교육이 빠르게 늘어나기 시작했다.  대학에서 융합교육을 운영하는 형태는 다양하다. 작은 단위부터 살펴보면 융합주제를 다루는 특강을 비롯한 비교과 활동, 다른 학문단위를 결합하여 하나의 주제를 다루는 융합 교과목, 다양한 전공자들이 주제를 중심으로 모여 연구하는 융합 연구 및 융합 프로젝트, 2개 이상의 전공이 새로운 학문단위로 접근하는 융합전공, 모집단위부터(신입생) 적용하여 새로운 학과를 개설하는 융합학과, 융합학과를 모아서 융합학문을 지향하는 융합학부 또는 융합단과대학이 있다. 여기에 앞에서 살펴본 다전공 이수 또한 학생이 2개의 전공을 이수한 후 개인차원에서 융합을 적용하도록 하는 융합지향의 교육으로 볼 수 있다. 특히 융합전공의 경우 입학은 기존의 학과(전공)로 입학하고 2학년 진입시점 또는 3학년 진입시점에 선택할 수 있는 유연성이 있기 때문에 많은 대학에서 별도의 융합학과를 개설하기보다 개설과 폐지가 자유로운 융합전공을 선호하는 편이다. 융합전공의 정확한 개념은 2개 이상의 전공이 포함되어야 하며, 교육과정 구성 상 기존 전공의 교과목 외에 융합전공만의 융합교과목이 포함되어야 한다는 것이 특징이다. 반면 연계전공은 관련된 전공의 기존 개설 교과만으로 구성이 가능하다. 이수하는 학생 관점에서 보면 융합전공은 입학학과가 있더라도 융합전공을 이수한 후 융합전공만으로 졸업할 수도 있고, 소속학과와 융합전공 2개의 복수전공 졸업도 가능하다는 것이 특징이다. 반면 연계전공은 반드시 소속학과 전공을 이수해야만 한다. 융합전공의 편성과 운영이 높은 기준을 요구하기 때문에 대학에서는 연계융합전공, 융복합전공 등의 다양한 명칭을 사용하여 융합전공의 기준을 유연하게 적용하기도 한다. [융합학과 신설 및 폐과 현황] 국내 대학에서 2019년부터 2022년까지 개설된 융합학과의 수는 903개, 1,170개, 1,309개, 1,392개로 매년 증가했으나, 전년대비 증가율은 29.6%, 11.9%, 6.3%로 증가폭은 감소하고 있다. 한편, 폐과된 융합학과 수는 337개, 398개, 542개, 722개로 매년 증가했으며 전년대비 증가율은 18.1%, 36.2%, 33.2%로 증가추세를 보이고 있다. 또한, 전년도 개설학과 대비 다음해 폐과된 학과의 수를 따진 폐과율은 2020년 44.1%, 2021년 46.3%, 2022년 55.2%로 매년 증가했다. [계열, 학과별 개설현황] 국내 대학에서 개설된 융합학과의 계열별 비중은 매년 1) 공학 > 2) 인문사회 > 3) 자연과학 > 4) 예체능 > 5) 의학 순으로 많았다. 매년 공학계열이 가장 많았지만 그 비중은 점차 줄어들고 예체능과 인문사회로 그 비중이 옮겨가고 있다. 의학분야는 매년 융합학과를 개설하고 있으나 그 비율이 매우 낮고 타 분야와의 융합이 거의 이뤄지지 않고 있다. [계열, 학과별 개설현황] 국내 대학에서 폐과된 융합학과의 계열별 비율은 매년 1) 공학 > 2) 인문사회 > 3) 자연과학 > 4) 예체능 > 5) 의학 순으로 앞서 살펴 본 개설 현황과 비율 순위가 일치하고, 비중이 가장 높은 공학, 인문사회 분야의 비율은 매년 증가함을 알 수 있다. 국내 대학의 융합전공제도 운영 상 가장 큰 문제점은 융합학과의 개설과 폐과가 잦다는 것이다. 개설되는 학과의 증가율은 둔화되는 반면, 폐과되는 학과의 증가율이 커진다는 것은 학과 개설에 충분한 고민과 연구가 없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학생의 니즈를 반영하고 산업에서 요구하는 인재를 양성하기 위한 교육과정을 만들기보다는 정부사업 수주, 외부 평가 등 외부적인 요인 등을 고려했기 때문에 이와 같은 결과를 초래했다고 볼 수 있다. [대학의 융합 목표와 방향] 대학에서 융합전공을 설치하고 운영하게 된 배경을 살펴보면, 대학 내부 특히 학과나 교수의 자발적인 필요에 의해서라기 보다는 산업과 정부, 학생의 요구에 의한 것이 주를 이룬다. 그렇다보니 대학이 속한 지역 및 산업의 특성, 대학의 특성을 고려하여 학과 간의 충분한 숙의 끝에 융합전공을 개설하는 것이 아니라 산발적으로 융합전공을 개설하고 운영하는 경향이 있다. 비슷한 융합전공이 개설되기도 하고, 융합전공에 참여하는 학과도 제한적이거나, 융합의 성격으로 보기 어려운 전공이 개설되기도 한다.  대학은 지향하는 융합목표와 융합방향을 명확하게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대학의 중장기발전계획, 특성화계획, 지역산업 및 인재 수요, 연구의 성과, 학생의 진로에 따른 수요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타겟할 분야를 설정해야 한다. 분야가 정해지면 기존의 학과와 연계하여 한 학과에서 커버할 수 있는 것인지 판단하고, 융합이 필요하다면 어떤 학과가 관련성이 있는지 교과목 단위까지 살펴야 한다.  [융합전공의 구성과 운영] 첫째, 대학은 융합전공 교육과정 편성 시 학생의 성장에 초점을 맞춘 목표를 설정하고, 세부내용을 면밀하게 검토해야 한다. 교육과정 편성 시 산업 현장에서 실제로 발생할 수 있는 문제나 사회적 문제를 포함시켜 학생들이 지식의 융합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을 키울 수 있도록 하는 등 융합전공에 특화된 내용과 교수법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둘째, 대학의 학과 중심의 교육을 벗어나 융합학문 및 융합전공을 지원하는 책임있는 조직이 뒷받침 되어야 한다. 학과중심의 교육은 전공 지식을 체계적으로 습득할 수 있고, 특정 분야의 전문가 양성에 유리하다. 또한 구성원의 소속감 증가로 공동체 형성이 가능하다. 하지만 현대사회가 요구하는 융합형 인재 배출에 한계가 있고, 변화에 기민하게 대응하기 어렵다는 단점이 있다. 학과 관점에서는 시대적 요구에 따라 융합전공을 개설하고 싶어도 학과 간 장벽이 커서 다른 학과와 원활하게 전공을 구성하기 어렵다는 한계도 존재한다. 따라서 융합전공을 구성하는 경우에는 융합전공을 전략적으로 구성하고, 행정적으로 지원하며, 융합전공을 이수하는 학생을 관리하는 거버넌스가 구축되어야 한다. 학과 간의 합의로만 전략없이 개설하고, 한 사람의 교수에게 운영을 맡기고, 학생이 자율적으로 이수 완료까지 책임을 지도록 하는 것은 융합전공이 실패하는 가장 큰 이유이다.  셋째, 학생관점에서는 융합교육에 대한 충분한 안내와 이수관리가 필요하다. 어떤 종류의 융합전공이 있는지, 융합전공별로 어떤 진로와 진출분야를 목표로 하는지, 융합전공 이수를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충분한 홍보와 안내가 필요하다. 또한 대학이 충분한 추가 자원을 투입하기 어렵다면 성공적으로 이수를 하기까지 지원할 수 있는 시스템으로 실시간 이수관리를 지원하는 것도 추천하는 바이다.     

24.06.14

[6월 CE] 최적의 의사결정

경영 리더들은 언제나 의사결정의 부담을 가지고 생활합니다. 그래서 많은 리더들이 직관과 논리의 교차점에서 꽤 긴 시간 고민을 하기도 합니다. 피터 드러커는 “성공적인 비즈니스를 보면 누군가 용기 있는 결정을 내렸다”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다만 리더의 의사결정은 ‘용기 있는’에 더해 ‘최적의’ 결정이어야 합니다. 이 최적의 의사결정이란 무엇일까요. ‘최적(最適)’이란 한자어 속에 이미 그 답이 있습니다. 즉 ‘가장’ ‘알맞은’ 판단을 내리는 것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최적의 의사결정을 위해 다음 세 가지를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먼저 제약조건(Constraint)을 고려한 의사결정이어야 합니다. 오늘날 조직 내외의 복잡한 경영 환경과 다양한 이해관계자들은 기업에 제약조건으로 작용하기도 합니다. 또한 이 제약조건은 비교적 고정적이던 과거와 달리 오늘날에는 시시때때로 변화하며 더욱 세밀한 리더의 결정을 요구합니다.  따라서 기업을 둘러싼 제약조건에 대한 정확한 판단과 세심한 고려는 최적의 의사결정을 위한 선결조건이 됩니다. 때로는 제약조건의 상황에 따라 최선이 아닌 차선이 최적의 의사결정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다음으로 과학적인 프로세스를 통한 의사결정이어야 합니다. 특히 정보, 즉 데이터에 대한 접근은 최적의 의사결정에 힘을 실어줄 수 있습니다. 리더의 직관과 경험에 분석의 과학이 합쳐지면 보다 현명한 의사결정을 위한 변수들을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의사결정의 과학적인 프로세스는 그 결정의 리스크를 최소화하는 역할을 합니다. 또한 의사결정의 당위성을 확보해 실행동력을 높일 수 있습니다. 이에 수학이나 행동과학 등 과학적 방법을 통해 의사결정을 돕는 운영 연구(Operation Research : OR), 즉 경영과학은 이미 오래전부터 리더의 예측력을 높이는 데 활용되고 있으며 최근에는 인공지능을 활용한 의사결정 지원 방법론들도 개발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시간, 장소, 상황, 즉 TPO(Time, Place, Occasion)를 고려한 의사결정이어야 합니다. 리더의 의사결정이 중요한 이유는 그 효용 가치 때문입니다. 최적의 TPO를 고려하지 못한 의사결정은 실행력에서 차이가 클 것입니다.  리더의 사소한 결정 하나도 기업의 현재 그리고 미래를 좌우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리더는 자신의 의사결정에 따른 실행이 어떤 효과를 가져올지에 대해 다각적으로 검토하면서 가장 적절한 답을 찾아가야 합니다. 가능한 많은 변수들에 대한 검토를 거쳐 최적의 의사결정을 해야 합니다. 기업의 경영자라는 자리의 무게는 무겁습니다. 경영자의 의사결정 역시 무거운 책임이 따릅니다. 왕관의 무게를 감당하며 매일 수많은 의사결정을 위해 고심하는 우리 경영자들이 앞서 말씀드린 세 가지에 유의하면서 최적의 의사결정을 내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한수희  한국능률협회컨설팅 대표이사 사장 

현대미술의 개척자, 빈센트 반 고흐

빈센트 반 고흐의 천재성에 대해서는 다양한 해석이 존재한다. 반 고흐는 오히려 살아있는 동안 인정받지 못하고 사회적, 개인적 도전에 끝없이 직면해야 했다. 그 과정에서 예술은 어떤 역할을 했을까. KMA가 주최한 ‘수요일에 만나는 지혜의 향연’에서 양정무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는 반 고흐의 작품과 삶을 통해 진정한 예술의 가치와 의미를 탐색했다. 빈센트 반 고흐는 전 세계인이 가장 좋아하는 화가 중 하나로 많은 이들이 그의 작품을 보며 감동한다. 그는 미술대학을 나오지 않았지만 대중에게 사랑받는 작가로 성장할 수 있음을 보여줬다. 평생 고독하게 살다가 37세의 나이에 권총 자살로 생을 마감했지만 많은 사람이 그의 삶을 기억한다.  반 고흐를 프랑스의 인상파 화가로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는 렘브란트 반 레인, 얀 반 에이크와 더불어 네덜란드를 대표하는 화가다. 이들처럼 네덜란드 사람들의 이름에는 ‘반(Van)’이 많이 들어가는데 이는 ‘~에서 왔다’라는 뜻이다. 그러니 반 고흐의 이름은 고흐에서 온 빈센트라는 의미로 해석된다. 일본 애니메이션 ‘플랜더스의 개’의 배경 플랜더스, 즉 플랑드르는 북쪽의 네덜란드와 남쪽의 벨기에를 아우르는 땅이었다. 원래는 하나이던 땅이 남과 북으로 분리되면서 지금의 벨기에와 네덜란드가 형성됐다.  플랑드르 지역은 프랑스와 독일 사이에 있었으며 맞은편에는 영국이 있었다. 네덜란드는 스페인의 지배를 받다가 독립했으니 그야말로 유럽 강대국들의 틈에 있었다. 그러나 네덜란드 사람들은 자신들을 작지만 강한 국가로 인식한다. 실제로 1609년 네덜란드 사람들이 그린 지도는 사자 모양을 하고 있다. 땅과 민족에 대한 의식이 지도에 반영된 것이다. 네덜란드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 중 하나가 풍차다. 네덜란드는 국토의 3분의 1이 해수면보다 낮아서 풍차를 돌려 물을 퍼내야만 살 수 있었다. 이런 척박한 곳에서 자본주의가 꽃피고 세계 최초의 국제 기업인 동인도회사가 만들어졌다. 힘든 땅에서 거칠게 살아온 역사가 있는 만큼 네덜란드 사람들의 기가 센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이러한 배경을 알고 나면 반 고흐의 삶이 더욱 흥미롭게 다가온다. 플라잉 더치맨에서 파리지앵으로 네덜란드 하면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이 무시무시한 뱃사람 이야기다. 그 유명한 ‘플라잉 더치맨(Flying Dutchman)’으로 저주에 걸려 영원히 바다를 표류하는 뱃사람과 유령선의 이야기다. 이 설화는 바그너의 오페라로 만들어졌으며 할리우드에서는 ‘캐리비안의 해적’ 시리즈 영화로 제작됐다. 어떻게 보면 네덜란드 사람들 모두 플라잉 더치맨, 즉 ‘방황하는 네덜란드인’이라 할 수 있다. 반 고흐 역시 플라잉 더치맨에 가까웠다. 목회자인 아버지 때문에 어릴 때부터 네덜란드 곳곳을 다녔다. 반 고흐는 대학에 가지 않는 대신 16세부터 23세까지 삼촌의 제안을 받고 화랑에서 아트 딜러로 일했다. 굉장히 내성적이고 소심한 사람으로 알려지지만 의외로 그림을 파는 일에는 꽤 유능했던 것 같다. 당시 유럽에서 가장 잘나가는 화랑의 헤이그, 런던, 파리 지점을 두루 다닌 것을 보면 말이다.  반 고흐는 많은 방황 끝에 27세에 화가가 됐다. 이후 37세에 죽음을 맞았으니 그가 화가로 산 세월은 단 10년이다. 화가가 되기로 결심한 반 고흐는 당시 많은 화가들이 그랬듯 대가의 작품을 베끼며 그림을 공부했다. 특히 밀레의 진솔한 그림을 좋아해서 여러 번에 걸쳐 그의 그림을 따라 그렸다. 1885년작 ‘감자 먹는 사람들’ 또한 밀레의 영향력 아래 있다. 이 그림은 농부들이 노동으로 얻은 감자와 차 한 잔을 나누는 모습을 담고 있다. 어둡고 통일감도 부족해 전혀 반 고흐답지 않은 그림이지만 반 고흐는 이 작품을 통해 화가로서의 자신감과 직업적 소명을 갖게 됐다.  만약 반 고흐가 계속 네덜란드에 머물렀다면 ‘감자 먹는 사람들’ 같은 그림을 주로 그렸겠지만 고향을 떠나 파리로 가면서 과감한 변화를 시도했다. 1886년부터 1888년까지 2년 정도 파리에 머물렀는데 당시 파리는 중세 도시에서 현대 도시로 탈바꿈하는 프로젝트를 대대적으로 진행하고 있었고 프랑스 혁명 100주년을 기념해 엑스포 기념탑인 에펠탑이 건설 중이었다. 위엄을 과시하는 개선문 주변으로 여덟 개의 도로가 사방팔방 뻗어나가며 파리는 오늘날과 같은 모습으로 변신했다. 반 고흐는 파리지앵이 되면서 새로운 세계의 영향을 받았다. 몽마르트 언덕에서 내려다본 파리의 풍경,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듯한 파리의 풍차를 자주 그렸다. 인상파의 영향을 받아 색채는 화려해지고 툭툭 끊어지는 붓 터치가 특징이 됐다. 그렇게 우리에게 익숙한 반 고흐의 세계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현대미술의 시작을 알린 선언 반 고흐는 파리에서 그림을 그리다가 화가로 진짜 명성을 얻으려면 심화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모든 것을 버리고 프랑스 남쪽 끝 아를로 가서 2년 가까운 시간을 보냈다. 그가 원한 것처럼 이 시기에 우리가 기억하는 반 고흐의 명작들이 쏟아져 나왔다. 아를에서 반 고흐가 가장 오래 산 집은 ‘노란 집’이라는 그림에 남아 있다. 그는 동생 테오가 보내준 돈으로 작업실과 침실을 갖춘 2층짜리 집을 구했는데 네모반듯한 집이 아니라 마름모꼴 집이라 임대료가 매우 저렴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그래도 반 고흐는 자신만의 집을 가져서 굉장히 행복해하며 벼룩시장에서 가재도구를 하나씩 구입해 방을 채웠다. 그 집은 벽이나 침대 모두 흰색이었다. 그러나 반 고흐는 그림 속에 민트색 바닥, 녹색 창문, 보라색 벽 등 다양한 색을 입혔다. 모두 상상해서 그린 것이다.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여기서만은 색채가 모든 것을 지배한다. 사실 이 그림을 어떻게 보는가는 마음의 상태와 상상력에 달려있다”라고 설명했다. 당시 인상파 화가들조차도 그림이란 눈에 보이는 정보를 화면에 옮기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반 고흐에게는 자신에게 어떻게 보이는가가 더 중요했기에 자신만의 느낌으로 재구성해 그림을 그렸다. 반 고흐의 이러한 작업은 곧 20세기 모든 화가들의 선언이 됐다. 즉 ‘노란 집’은 반 고흐가 새로운 세계로 가는 과도기이자 추상미술의 시작을 알리는 작품이 된 것이다. 반 고흐는 “나 자신을 강하게 표현하기 위해 색채를 주관적으로 사용한다”라면서 과감한 색채 배합을 시도했다. 화가들은 보통 빨간색과 초록색, 오렌지색과 파란색 같은 보색을 쓰는 걸 꺼린다. 너무 튀기 때문이다. 그러나 반 고흐는 ‘밤의 카페’라는 작품에서 술집의 마감 풍경을 강조하기 위해 과감한 보색 대비를 사용했다. 아를 시절 반 고흐는 밤 그림을 많이 그리기도 했다. 그는 밤에 일렁이는 별빛을 파란색과 노란색 톤으로 그렸다. 밤을 이러한 색을 이용해 그린 화가는 반 고흐가 처음이었다.  작품에서도 드러나듯 당시 그는 홀로 지내는 아를 생활이 무척 외로웠을 것이다. 그래서 파리에서 알던 친구들에게 아를에서 함께 그림을 그리자며 편지를 보냈는데 이에 화답한 이가 폴 고갱이었다. 반 고흐의 ‘해바라기’ 연작이 탄생한 것도 이때쯤이다. 고갱과 반 고흐를 연결해 주는 꽃이 해바라기였기 때문이다. 해바라기의 원산지가 아메리카인데 고갱의 고향이 바로 페루였다. 반 고흐는 고갱을 환영하기 위해 고갱의 방을 해바라기로 채워 주고자 했으며 그를 기다리며 해바라기 그림을 10점 이상 그렸다.  반 고흐가 그린 해바라기를 자세히 보면 만개한 꽃이 있는가 하면 꺾이거나 시들어 죽어가는 꽃도 있는 걸 확인할 수 있다. 네덜란드에서 꽃 그림은 조금 색다른 의미를 지닌다. 17세기 렘브란트가 그린 꽃만 보더라도 화려한 꽃도 있지만 죽은 꽃도 있다. 여기에는 화려한 삶도 곧 지나간다는 네덜란드 사람들의 청교도적 묵상이 담겨 있다. 반 고흐의 ‘해바라기’ 연작 또한 삶의 위기를 한 번쯤 생각하게 하는 철학적인 메시지를 준다. 고독과 절망 속에 탄생한 걸작들 고갱과 반 고흐는 둘 다 늦게 그림 공부를 시작해서 쉽게 친해졌지만 작품 세계나 성격 면에서는 극과 극에 놓인 사람들이었다. 고갱은 자유분방하고 자기애가 강한 반면 반 고흐는 소박하고 소탈했다. 두 사람은 아를에서 100일 정도 같이 살았는데 처음에는 잘 지내다가 점점 싸우는 일이 잦아졌다. 당시 반 고흐는 여러 질병을 앓고 있었으며 간질에 걸렸다는 설이 많다. 1888년 크리스마스를 이틀 앞둔 날 두 사람이 격렬하게 싸우던 중 반 고흐가 발작하며 자신의 귀를 잘라 자해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깜짝 놀란 고갱은 테오에게 편지를 쓴 후 파리로 떠났다. 병원에 입원했다가 자신의 노란 집으로 돌아온 반 고흐는 다시 붓을 잡고 ‘붕대를 감은 자화상’을 그렸다. 이후 반 고흐는 더욱 고독과 절망에 시달렸다. 건강은 급속도로 나빠지고 친구는 떠났으며 동생의 계속된 지원에도 그림은 팔리지 않았다. 이때부터 2년간 병원과 집을 오가다 생을 마감하게 된다. 사실 ‘별이 빛나는 밤’은 그가 상 레미의 정신병원에서 아픈 몸을 이끌고 그린 그림으로 정신장애로 인한 고통이 잘 묘사되어 있다. 반 고흐는 해가 뜨기 전 새벽에 이 그림을 그렸는데 작품 속에는 사람 하나 없이 하늘에 별만 휘몰아치듯이 빛나고 있다. 사이프러스 나무는 뭔가를 간절하게 열망하듯 하늘 높이 솟아있는데 서양에서 이 나무는 보통 공동묘지에 많이 있다고 한다. 반 고흐가 말년을 보낸 곳은 파리 근교의 소도시 오베르다. 이곳에서 그는 오베르 성당을 그리는가 하면 정신과 의사 폴 가셰의 초상화를 그리기도 했다. 반 고흐가 권총 자살을 하기 직전에 그렸다는 ‘까마귀 나는 밀밭’은 아주 슬픈 그림이다. 밀밭과 밀밭 사이에 길이 펼쳐져 있지만 자세히 보면 막다른 길이다. 아마도 좌절된 운명과 죽음을 암시하는 그림이 아니었을까. 반 고흐가 세상을 떠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동생 테오도 죽게 된다. 두 사람은 오베르의 묘지에 나란히 묻혔다. 형에 대한 테오의 사랑은 정말 수수께끼 같을 정도다. 그는 요한나라는 네덜란드 여성과 결혼해 아들을 낳았는데 형의 이름을 따 아들에게 ‘빈센트’라는 이름을 지어줬다.  반 고흐는 가뜩이나 그림이 안 팔려 동생에게 면목이 없는데 조카가 자신처럼 인생이 꼬일까봐 굉장히 괴로워했다. 어쨌거나 반 고흐는 살아있을 때는 동생의 힘으로 활동할 수 있었고 죽어서는 요한나의 노력으로 재평가받을 수 있었으니 가족의 도움이 실로 대단했다. 반 고흐는 동생과 700통이 넘는 편지를 주고받았다. 그 편지는 일종의 작업 노트이자 작품 설명서이기도 했다. 요한나는 이를 모아서 책으로 냈고 반 고흐의 큐레이터 역할을 훌륭히 해냈다. 좋은 곳에 전시할 수 있도록 신뢰가 가는 국립기관 위주로 작품을 팔았으며 조카 빈센트 윌렘 반 고흐는 보유하고 있던 작품을 기증해 미술관을 만들었다. 그리고는 죽기 전까지 미술관에 매일 출근했다. 현대미술을 이끈 실험적 개척자 반 고흐 이후 수많은 화가가 해바라기를 그렸다. 독일 화가 에른스트 키르히너는 1906년 꽃병 앞에 있는 사람의 그림을 그렸는데 꽃병에 꽂힌 꽃이 바로 해바라기다. 이는 명백히 반 고흐에 대한 오마주로 반 고흐가 해바라기를 자신만의 강력한 브랜드로 만든 것이다. 반 고흐의 영향력은 야수파 화가들의 작품에서도 드러난다. 마티스는 반 고흐의 ‘노란 집’을 오마주한 작품 ‘빨간 방’에서 튀어나올 듯 강렬한 빨간색을 사용했다. 블라밍크는 울긋불긋한 피부색의 초상화를 그리면서 “나는 아버지보다 반 고흐를 더 사랑한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반 고흐는 죽은 지 40년이 넘어 현대미술을 이끈 실험적인 작가로 인정받게 되었다. 1936년 뉴욕 현대미술관(MoMA)이 주최한 ‘큐비즘과 추상미술’ 전시에서 알프레드 H. 바 주니어 관장은 현대미술 계보도를 전시회 카탈로그 표지에 실었는데 거기에 이름이 상단에 올라가며 반 고흐는 현대미술의 개척자로 재평가받았다. 반 고흐는 살아있을 때 자신의 그림이 어느 정도의 가치를 지녔다고 생각했을까. 테오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이거 하나 팔면 한 달은 먹고살 수 있지 않을까”라는 대목이 있으니 대략 300만~400만 원 정도로 생각하지 않았을까. 그런데 1987년 ‘해바라기’는 4000만 달러에 팔렸고 지금 가격으로 환산하면 900억 원에 달하는 금액이다. 실제로 마켓에 나오면 그 가치가 얼마나 오를지 상상하기 어렵다. 현재 반 고흐의 대중적 인지도는 엄청나다. 전 세계에서 반 고흐의 작품이 카피되고 있으며 특히 홍콩의 미술 공장에서는 반 고흐 때문에 먹고사는 카피 화가들이 많다. 심지어 우리나라 을지로에 가도 해바라기 그림을 흔히 볼 수 있다. 게다가 반 고흐의 불꽃같은 생을 소재로 한 영화나 드라마가 몇 년 주기로 만들어진다.  반 고흐의 그림은 외로운 느낌을 준다. 풍경화에는 등장인물이 없고 꽃이 만개한 것도 아니며 결핍의 아픔마저 느껴진다. 그럼에도 현대인들은 반 고흐의 그림을 보며 심리적 안정을 취한다. 드라마틱한 인생을 살았던 빈센트 반 고흐는 현대미술의 변화를 이끌었을 뿐만 아니라 바쁜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힐링의 순간을 선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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